글. 박수민 에디터 사진. 권순일 포토그래퍼
삼국사기에 깃든 마음처럼
어떤 것은 어떤 것에 버금간다. 즉 ‘으뜸’이라는 뜻이다. ‘버금간다’에서 따온 스튜디오 이름은 이들과 참 닮아있다. 스스로 잘하는 걸 알지만 으스대며 뽐내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또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스튜디오 버금이 바라는 바다.
“으뜸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조금 다른 개념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 사람이 으뜸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 사람이 으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 개념을 우리 작업에 녹이고 싶었어요.”
하나의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그것을 작업에 녹여낸다는 이들은 삼국사기의 문구를 참 좋아했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지을 때 마음을 쓴 것이 ‘임금이 머무는 곳이니깐 권위 있어야 하고, 화려함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백성을 섬기는 임금이기에 높은 담장을 사용하면 안 된다.’였다. 그것처럼 스튜디오 버금도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적정선을 찾으려 노력해나가고 있다.
이심전심, 그들의 마음이 닿다
삼국사기에 담긴 정도전의 마음을 동경하는 이들은 전통과 현재를 엮어서 세련되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한 제품을 만든다. 스튜디오 버금은 외규장각 의궤를 모티브로 ‘달력’을 만들기도 했고, 서울 산책 지도를 만들기도, 그 외 국립박물관, 문화진흥원, 문화재단 등의 문화상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외규장각 의궤는 중요한 행사 등을 그려놓은 것인데, 일종의 설계도와 같은 개념이죠. 행사가 있기 전 의궤를 보고 동선을 맞추고 본인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거죠.”
외규장각 의궤를 만들 당시엔 큰 종이가 없었을 테니 부분 부분을 쪼개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만약 내가 선조라면 한번에 쫙 이어붙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에 탄생한 외규장각 족자. <영조정순후가례도감 의궤 특별전>을 위해 개발한 족자는 도감 내용 전체가 담겨있다.
“족자를 펼치면 5m 정도 되는데, 우리처럼 쭉 이어진 의궤를 보고픈, 소장하고픈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만들었어요.”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고, 당시 만든 족자는 품절됐다. 굵직한 작업도 많이 했고, 만든 상품은 모두 판매됐으니 뚝딱 뚝딱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스튜디오 버금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명태’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공을 들여 작업하는지 알 수 있다. 조그마한 명태를 만드는데 이들은 꼬박 3년을 쏟았다.
명태, 우리나라를 대표할 때까지
“일본 하면 마네키네코가 있듯이 우리나라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명태예요. 복을 상징하기도 하고요.”
제주도에 하르방이 있지만,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만든 명태. 처음 만든 명태는 명주실을 몸에 감아두었는데 실크다 보니 너무 잘 풀려서 문제였다. 이후에 일반 실을 썼는데, 그 느낌이 살지 않아서 그냥 명태로 만들었단다.
“명태는 3D 프린터를 사용해 만들었어요. 사출하려면 앞뒤가 같아야 하는데, 그럼 디테일을 살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직접 3D 랜더링 작업을 한 후에 3D 프린터로 만들어 냈죠.”
스튜디오 버금 작업실 한켠에는 몸에 명주실을 감고 있는 초창기 명태부터 가장 최신작까지 여러 마리의 명태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스튜디오 버금, 모두를 하나로 묶다
스튜디오 버금이 생긴 지 10년이 됐다. 많은 작업을 했지만 그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현재 스튜디오 버금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정연중 디렉터, 장민지 디자이너, 공유림 디자이너, 남궁미나 디자이너 이렇게 네 명이다. 그들의 명함에는 숫자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기록과 같은 것이다.
“함께 했던 사람들과 지금도 만나는데, 그들을 기억하고 싶어 들어올 때마다 명함에 번호를 적어요. 그게 그 사람의 고유번호가 되는 거죠. 그 사람이 나가도 그 번호는 그대로 두어요.”
스튜디오 버금의 시작은 정연중 디렉터가 열었지만, 그때부터 한결같이 그 곁을 지킨 장민지 디자이너를 비롯해 공유림 디자이너와 남궁미나 디자이너가 있기에 지금의 스튜디오 버금이 있다.
처음 스튜디오 버금을 만들 때만 해도 ‘10년 후 딱 두 사람만 남기자.’라고 했는데, 한결같이 함께 하는 이들과 거쳐간 사람들까지 이미 여러 사람이 스튜디오 버금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함께’
서로가 곁에 있다면 어떤 작업이든 할 수 있다는 이들은 일로 만난 사이지만, 그것을 너머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문화상품 개발 등과 같은 디자인 작업을 잘하는 스튜디오 버금이지만,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다채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했다. 하나에만 집중하기에 이들은 자유로웠으며 꿈꾸는 바도 모두 달랐다.
“스튜디오 버금 작업실 옆에 ‘SECOND UNIVERSE’라는 이름의 편집숍이 있어요. 장민지 디자이너가 리테일에 관심이 많은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구해서 우리 숍에서 판매를 하죠. 장민지 디자이너가 숍매니저를 하고 싶어 한다면 공유림 디자이너는 꽃집을 하고 싶어 해요.”
그런가 하면 타고난 손재주를 자랑한다는 정연중 디렉터는 스튜디오 버금에서 10분 거리에 이미 공방을 만들어 두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두지 않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이들은 무엇이 됐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스튜디오 버금에서 진행하게 될 새로운 작업이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함께 그려갈 앞으로를 응원한다.